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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나그네 / 박이도




                                먼 길 떠나기 위해
                                단잠에서 깼다
                                아직 어둠이 머뭇거리는
                               새벽하늘에 아침이 온다 
                               희끗희끗 날리며 앉으며 
                               순식간에 천지를 휘감아
                               화살 짓는 눈발
                              서로 부딛치며 떠밀리며
                              지상엔 하얀 폭풍이 인다. 
                              나뭇가지 위의 새둥지가
                              툭 떨어지고 새들이
                              포롱포롱 황급히 떠난다
                              굳게 닫힌 성당 문이 삐걱
                              천장에 누워 있던 12사도가 
                              모자이크를 털어내고 걸어 나온다
                              뚜벅뚜벅 눈 속으로 떠나간다
                              그 뒤를 내가 따라 나선다
                              열 둘 그리고 열 셋의 발자국이
                              하얀 폭풍 속으로 사라졌다
                              발자국 뒤로 남는 헛기침 소리


박이도(1938~)
1963년 경희대 국문과 동대학원 문학박사
1980~2003 경희대 국문과 교수
2008~ 월간 창조문예 주간, 박이도 시집 <어느 인생>, 시선집 <지상의 언어>


시읽기/ 윤형돈

저자는 詩選集 ‘지상의 언어’ 서문에 붙이는 단상에서 “신의 비의(秘儀)를 묵상하는 일이 나의 우주적 미래의 언어인 것을 나는 믿는다 지상의 언어, 나의 시들을 세상의 우표 한 장 붙여 풍선으로 띄워 버리자 민들레 씨앗으로 바람 속에 날려 버리자 내 영혼의 노을 길에 찾아갈 영원한 나라의 언어, 천상의 언어를 듣기 위해서”라고 썼다. 여기서 ‘비의’란 비밀스러운 종교의식을 말한다. 이것은 그가 월간 창조문예의 주간을 맡으며 ‘문학을 통하여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즐거워하는 기쁨을 이 땅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는 독실한 신앙인의 기본 강령과 일치한다.

시의 화자는 지금 눈 오는 새벽 숲가에 서 있다 동틀 무렵, ‘먼 길 떠나기 위해 단잠에서 깼다’ 잠 들기 전에 가야 할 먼 길이기에 순례자가 사모하는 곳에 가기 위해서는 새벽 단잠과 꿀잠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누군가와 지켜야 할 엄연한 약속과 경건한 하늘의 소명이 있기에 그는 돌베개 베고 자는 고단한 사역(使役)의 잠을 즐긴다. 어둠이 덜 가신 미명의 새벽하늘, 눈발은 마치 ‘화살’을 마구 쏘아대듯 눈 줄기의 기세가 맹위를 떨친다. 이윽고 ‘나뭇가지에 새둥지가 떨어지고’ 작은 새는 황급히 어디론가 ‘포롱포롱’ 떠날 정도로 순식간에 천지를 휘감아 돈다. 따뜻한 품이요, 안온한 휴식처였던 ‘새둥지’가 떨어졌으니 겨울 나그네 자신의 운명은 방랑자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다 이를 수용하고 감내하며 때론 거리의 전도자가 되어 12명의 제자처럼 뿔뿔이 흩어져서 혹독한 겨울을 견뎌야만 한다. 다양한 빛깔과 성정(性情)을 지닌 열 두 제자들이 교회 천장 모자이크 그림에서 현현(顯現)하여 ‘나’와 동행하며 비로소 13인의 완전체가 되었다. 마치 이상의 <오감도>에서 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듯 ‘하얀 폭풍’ 속이란 절대 사명의 자리에 ‘발자국‘을 남기며 ‘뚜벅뚜벅’ 자신의 도를 묵묵히 수행하는 것이다. ‘헛기침 소리’는 인기척으로 내는 목청이지만, 태초에 생령을 불어넣으신 분에게 은밀히 보내는 ‘비의(秘儀)’의 신호가 아닐까. 너무나 가벼운 걸음걸이. 그림자마저 따돌리고 그는 또 어디로 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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